바람이 몹시 사납고 거셉니다. 기세가 워낙 맹렬해서 디지털 세상의 도래에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지금 입시의 대세로 굳어진 ‘의대 열풍’ 얘기입니다. 앞으로 20년, 30년 이후 자신이 살아갈 인생이 걸린 투자가 바로 입시입니다. 그동안 대학만을 보고 달려온 그들에겐 새로운 미래 세상, 각자의 적성을 생각해 신중한 결정이 필요합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게 아무래도 불안합니다. 입시에 잔뜩 낀 거품 때문에 그렇습니다.
거품은 한때 튤립에서 부터 대단했습니다. ‘사랑과 매혹’ 꽃말을 가진 튤립. 1630년대 중반 터키에서 이 꽃이 수입되자 돈이 넘쳤던 황금기의 네덜란드 사람들은 그 아름다움에 홀딱 반했습니다. 꽃값이 치솟자 이걸 이용해 큰돈을 벌려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화훼의 붐까지 일었고, 꽃값이 오르는 동안엔 모두가 돈을 벌었습니다. 투자가 또 투자를 끌어들였습니다. 수년간 열풍이 계속되면서 아직 땅속에 있는 것도 거래하는 선물시장까지 생겨나 희귀한 튤립 하나면 집 한 채를 살 수 있을 정도로 값이 폭등했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오를 만큼 올랐다고 생각했습니다. 1637년 2월 하루아침에 값이 폭락했습니다. 당시 수천 명이 파산한 ‘튤립 버블’은 가치보다 유행에 편승한 투자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줍니다. 남들이 뛰면 덩달아 따라 뛰는 게 늘 문제입니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달리는 역마차. 서부 개척 시대엔 이 밴드웨건이 금광의 발견 소식을 알렸고 사람들을 몰고 갔습니다. 퍼레이드 맨 앞에서 행렬을 선도하는 악대처럼 요란한 마차는 주변의 관심을 끌기 마련입니다. 따라 뛰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호기심, 때론 일확천금의 기대감이 깔려있습니다. 유행에 휩쓸려 목적지도 모르고 편승했던 부화뇌동의 후유증은 지금도 곳곳에서 확인됩니다. 주식과 가상화폐, 아파트까지 ‘빚투’로 ‘영끌’했던 결과가 참담합니다. 가치와 가격을 제대로 따지지 않고 투자한 건 각자의 책임입니다. 낙관적 기대에 매몰되어 실제 가치보다 높은 가격을 지불하는 바보는 더 큰 바보가 나타나서 그걸 살 거라고 믿습니다. 시장에서 종종 열풍처럼 나타나는 ‘밴드웨건 효과(band wagon effect)’를 케인즈는 ‘큰 바보 이론(greater fool theory)’이라고 불렀습니다.
대학은 인생의 본선을 준비하는 곳입니다. 자신이 꿈꾸는 미래, 세상의 변화와 적성에 맞는 전공학과의 선택은 그래서 인생의 기로(岐路)입니다. 앞으로 살아갈 세상, 대학 졸업 후의 한 세대 이후의 삶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진학의 열기. 시대마다 성장을 주도했던 산업에 따라 유행처럼 인재가 몰렸습니다. 1960년대엔 섬유공학·화학공학과로 몰렸고, 1970년대에는 정부의 중화학·중공업 육성으로 기계공학과, 중동 건설 붐으로 토목‧건축공학과, 조선공학과 등이 인기였습니다. 1980년대 들어 전기·전자 분야의 집중 투자로 물리학과, 전자공학과 등으로 몰렸고, 1990년대엔 IT산업의 등장으로 컴퓨터공학이 급부상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의예과나 한의학, 치의예과 등의 인기는 꾸준히 올랐고, 인문계에선 법학과, 경영·경제 등 상경계열의 인기가 꾸준하지만, 물리학, 철학 등 자연과학 학문과 인문학은 유행에서 멀어졌습니다. 아날로그 시대에 우리 경제를 이끌었던 신산업과 대학 교육 간의 선순환 구조였습니다. 그때도 꼭 필요한 건 장기적 안목이었습니다.
지금은 패러다임의 대전환 중인 디지털 시대. 의료계에선 AI 활용이 본격화되고 있습니다. 지난 4월 미국 의사회 내과학회지에는 임상 추론에서 오픈AI의 챗GPT-4가 의사보다 나은 능력을 보였다는 연구 결과가 실렸습니다. 현직 의사 39명과 챗GPT-4의 비교에서 진단의 정확도와 효율성, 근거 제시 등에서 AI가 더 높은 점수를 받은 겁니다. ‘AI 의사’에게 진료받는 날도 멀지 않았다는 전망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로봇 수술 분야에선 이미 보편화된 AI 역할이 의학 데이터 분석이나 신약 개발 분야에도 빠르게 확대되고 있습니다. 최근 한국은행이 직업별 AI 노출 지수를 근거로 AI로 대체되기 쉬운 직업을 분석한 결과 의사가 상위 1%의 위험 직업으로 꼽혔습니다. 생성형 AI가 대중화되면서 콜센터 상담원, 사무원과 프로그래머, 기자와 회계사, 통역사처럼 단순‧반복 업무를 수행하는 직업뿐 아니라 의사, 약사와 변호사 같은 전문직도 위태롭다는 예고입니다.
의대 열풍은 정상 수준을 한참 벗어났습니다. 2025학년도 의대 정원이 늘면서 입시 판도의 변화로 '의대 N수생'도 늘어날 듯합니다. '메디컬 고시' 광풍입니다. 의사는 고소득이 보장되는 전문직임은 분명합니다. 지금이 그렇다는 겁니다. 너도나도 뛰어들 만큼 매력이 차고 넘치는 직업일까. 다른 쪽에선 뜨는 직업들이 속속 생겨나고 있습니다. 야심 있는 청년이라면 AI가 대체할 분야보다는 남이 모르거나 하지 않은 걸 처음으로 새롭게 밝혀내는 창발(創發)의 영역이 어디인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상상이 현실이 되는 세상에선 인문학에 대부분 해답이 있습니다. 지금 의대 열풍은 입시의 이례적 현상(market anomaly). ‘튤립 버블’, ‘밴드웨건’을 경계해야 합니다. 정상이 아니란 걸 깨달을 땐 이미 늦습니다. 지금은 디지털 대전환의 시대. 인공지능 시대의 최고 자리는 누구의 몫일까. 인생을 걸 바람직한 선택지는 어디일까. 방학 중 읽어볼 만한 책을 우리 학생들께 권합니다.
<총장의 메시지>
-[총장의 메시지_38] 전공선택이 자유로운 대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