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은 OECD 최고의 자살률 국가인 우리나라에서 특히 자살이 많은 장소. 2012년 서울시는 자살 시도가 가장 많은 마포대교를 대상으로 예방 캠페인을 벌였습니다. '희망 메시지'를 난간에 붙여 LED 조명으로 밤에도 볼 수 있게 하고 마지막 통화를 위한 ‘생명의 전화’도 곳곳에 설치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기대와 전혀 달랐습니다. 전년도 15건의 자살 시도가 오히려 93건으로 폭증했고 그 이듬해엔 184건으로 더 늘었습니다. 잘해보자고 한 일로 서울시는 ‘자살의 명소’를 만든 비난까지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엔 맹점이 있었습니다. 어디까지가 ‘자살 시도’인가. 뛰어내린 경우와 난간을 붙잡고 있는 경우, 생명의 전화, 시민의 신고와 순찰, CCTV 등이 모두 포함되었는데, 이전에는 뛰어내렸거나 소방대가 출동한 경우만 자살 시도로 집계했던 겁니다. 2011년과 2012년 마포대교에선 각각 11건, 15건의 자살 시도로 5명, 6명씩 사망했지만, 생명의 다리 설치 후 2013년, 2024년 모두 자살로 죽은 사람은 각각 5명으로 약간 줄었고 생존 확률은 크게 늘었습니다. 이 캠페인의 성공으로 작년 11월엔 한강대교가 두 번째로 ‘생명의 다리’가 되었습니다. 부적합한 데이터로 인한 표본오류는 주변에서 흔히 발견됩니다. 통계로 보면 강원도는 인구 10만 명당 27.3명(2021년 기준)으로 자살률 전국 1위. “하필 강원도에 와서 자살하는 분들 때문에 오명을 씁니다.” 행복한 강원도를 표방했던 최문순 전 도지사의 하소연도 표본오류 때문입니다.
같은 문제라도 어떤 방식으로 보느냐에 따라 판단과 선택이 달라지는 현상. 관점(觀點)을 어떻게 두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걸 ‘프레이밍 효과(framing effect)’라고 합니다. 장님이 코끼리 만지듯 어느 한쪽만을 갖고 판단함으로써 나타나는 편향성(bias)이 원인입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중 폭격기의 손상을 분석했던 통계학자인 아브라함 왈드(Wald, A.)가 밝혔던 사례에서 분명해집니다. 당시 해군에서는 폭격기의 피해를 최소화할 방법을 검토한 결과, 비행기의 손상이 가장 많은 부분의 장갑을 두껍게 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왈드는 분석센터의 결론에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조종석과 엔진, 양익 중앙과 동체 후방 부분이 손상된 전투기는 생환할 수 없었던 겁니다. 표본오류로 인한 편향은 우리 주변에 널려있습니다. 이 ‘생존 편향’은 실패한 사람들의 부족한 데이터에 비해 가시성이 두드러지는 생존자들의 사례에 집중함으로써 낙관주의와 ‘과신 오류’에 빠지게 합니다. 실패보다 쉽지 않은 성공을 일반화하는 오류의 함정이 되기도 합니다. 언론의 편향성을 보여주는 그림처럼 잘못된 프레임은 진실을 거꾸로 전달하기도 합니다.
주식으로 돈 번 사람, 성공한 사업가는 책을 쓰고 연사로 나서는데, 실패한 사람은 침묵할 수밖에 없습니다. TV 인기 프로 ‘나는 자연인이다’처럼 산속으로 들어간 사람은 모두 건강해지고 행복할까. 휘트니스를 하면 누구나 운동선수 같은 몸짱이 될까.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시대를 살면서 그들은 왜 세계가 부러워하는 대한민국을 ‘헬조선!’이라고 할까. 인간에겐 보고 싶은 것, 듣고 싶은 것, 자기 생각과 일치하는 것만 받아들여 신념을 확증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지금은 유튜브를 비롯한 각종 SNS가 정보를 지배하는 시대. AI의 알고리즘으로 정보의 편향성이 날로 심해지고 있습니다. 이용자의 성향을 파악해 각각 선호하는 뉴스나 콘텐츠만을 보여주는 개인 서비스로 진화하면서 나타나는 역기능입니다. 특히 정치에 의해 만들어진 프레임에 갇히는 경우엔 편 가르기가 견고해집니다. 한미 FTA 협상 당시 몇 달간씩 국정을 마비시킨 광우병 횃불 시위도 국민을 공포의 프레임에 가둔 결과였습니다. 당시 광우병으로 죽은 국민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똑같은 현상을 놓고 해석이나 판단이 달라지는 인식의 왜곡을 그래서 우리는 경계해야 합니다. 프레임이 바뀌면 세상을 보는 눈, 인생관이 달라집니다. 삶은 그 가치를 누구도 쉽게 평가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인생의 바깥이 아닌 그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욕망과 권태 사이를 오가는 시계추와 같다.” 사는 게 왜 고통인지를 파헤친 염세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인생의 본질에 대해 한 말입니다. 이 말이 맞는지는 모릅니다. 반대편의 프레임으로 세상을 본 철학자도 있습니다.
“아모르 파티(amor fati)!”
자신의 운명을 사랑했던 니체가 삶을 빗댄 운명애(運命愛, love of fate)를 뜻하는 그리스어입니다. 인생이 평탄했다면 그냥 흘릴 수 있는 말이지만, 그의 삶은 불행했습니다. 다섯 살 때 부친을 잃고 25세에 스위스 바젤대학 교수가 될 만큼 천재였지만 교수 생활 10년도 못 하고 병으로 사직하고 혼자 좋아했던 제자의 사랑을 얻지 못한 채 평생 독신이었습니다. 출판사마다 인기 없는 책을 꺼린 덕분에 자비로 출간했습니다. 이름이 알려지는 듯 했던 45세에 병마가 덮쳐 10년을 식물인간으로 살다 죽었습니다. 험난한 운명을 살고 간 그가 말하는 초인(超人)은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을 보는 창틀, 프레임은 잠깐 마음을 고쳐먹는 것에 그쳐선 안 됩니다. 그게 습관이 되고 생활이 되고 삶의 철학이 될 때까지 프레임은 끊임없이 수정해 나가야 합니다. 살아가면서 체험하고 이미 어렴풋이 알고 있는 걸 분명하게 개념화해서 우리 눈앞에 보여주는 게 철학입니다. 흔히 철학이 어렵다고들 하지만, 그래서 가장 쉬울 수도 있습니다. 프레이밍은 곧 삶을 바꾸는 철학입니다. 음지를 향한 창틀로 보면 세상이 온통 어둡고, 양지를 향한 창틀에선 밝은 세상만 보입니다. 지금은 앞으로 펼쳐질 인생의 앞날, 삶의 가치를 차분히 사유해 볼 시기. 우리 학생들이 읽어 볼 만한 책을 소개합니다.
<총장의 메시지>
-[총장의 메시지_34] 실패의 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