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는 칠판에 쓰고 학생들은 노트에 적었습니다. 옮겨 적는 교수와 받아 적는 학생 모두 진지했고, 강의실은 늘 고요했습니다. 암기력이 좋은 학생이 높은 학점으로 장학금을 받았습니다. 과거의 대학교육이 그랬습니다. 지금도 크게 달라진 건 없습니다. 1969년 아폴로 11호 우주선에 실렸던 데이터보다 수백만 배가 더 담긴 지식창고 스마트폰을 옆에 두고도 머릿속에 저장된 기억으로 우리는 시험을 봅니다. 개인의 수학능력, 학습의 성과를 시험지로 평가하는 신입생 선발제도가 여전한 건 아마도 더 나은 방법이 없기 때문일 겁니다.
이젠 이걸 바꿔야 합니다. 세상이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지식을 머릿속에 가득 채운 사람보다는 창의력과 문제해결 능력을 갖춘 인재를 사회가 원합니다. 콘텐츠와 방법이 문제입니다. 방법은 플립 러닝이 대세입니다. 종전의 강의방식을 홱 뒤집는 ‘플립(flip)’은 ‘거꾸로 강의실’입니다. 교수가 강의 동영상을 올려놓으면 학생이 미리 보고 수업 때 발표하고 토론하는 이 쌍방향 학습. 이 방법은 2000년 미국 교수학습학회에서 처음 발표된 후 전 세계적으로 확산 중입니다. 우리 대학도 2019년 도입한 이후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면서 지금은 전체 학부 교과목의 약 32%가 플립러닝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거꾸로 하는 이 방식이 처음엔 교수에게 부담스러웠지만, 차츰 교수와 학생들의 강의 만족도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옆 사람의 발표를 보면서 독창적인 접근방식과 해법 제시 등에 자극을 받는 수강생이 늘고 있습니다. 보편적인 강의방식으로 정착되기까지 꽤 시간이 걸릴 거라는 예상보단 빠른 진전입니다.
사실, 학습의 목적은 근본적으로 두뇌 단련에 있습니다. 머릿속 지식의 양은 어떤 경우라도 넘칠 리 없고, 또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성능이 뛰어난 펌프라도 끝없이 저수지에 닿아 있지 않거나 채워줄 장치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면 그건 쓸모없는 도구일 뿐입니다. 지금은 쳇 GPT가 논문을 써줄 만큼 지식이 넘쳐나는 초연결 시대. 연결할 도구의 종류를 알고 그 이용법을 파악하는 게 공부의 핵심입니다. 2013년 세계미래학회(WFS)는 ‘미래에 사라질 10가지(Top 10 Disappearing Futures)’ 제목의 보고서를 내놨습니다. 회원을 대상으로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것 중 15~20년 후 사라질 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라는 설문에 대해 2030년쯤 되면 편협성과 오해, EU, 일자리와 직장, 모델과 상점, 종이, 스마트폰 그리고 ‘교육과정(educational processes)’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지금은 상상이 현실로 되는 4차 산업혁명의 시대. 미국에선 로마 신화 속 ‘지혜의 여신’ 미네르바(Minerva)가 현실에 등장했습니다. 캠퍼스 없는 대학으로 설립되어 2019년 5월 첫 졸업생을 배출한 미네르바 대학. 이곳의 학습은 전혀 다릅니다. 가장 혁신에 성공한 대학으로 평가받는 이 글로벌 대학은 토론방식으로 문제 해결형 인재를 선발하고 교육합니다. 하버드를 능가하는 1% 이하의 합격률의 배경에도 ‘거꾸로 하는 선발방식’이 있습니다.
존경하는 교수님, 그리고 재학생 여러분,
우리 대학 교수학습센터에서는 앞으로 플립러닝에 관심 있는 교수님들께 활용 방법을 꾸준히 안내해 드릴 것입니다. 그리고 2학기 중에는 교과과정의 개편을 통해 다음과 같이 교육의 콘텐츠와 방법을 바꾸고자 합니다. 첫째, 산업계의 니즈(needs)를 반영한 수요자 중심의 교과목 개편입니다. 공통 융합교과목의 확대, 인턴십 프로그램의 확대, 교수 책임시수의 감축 등에 초점을 둔 개편안 마련에 협조를 구합니다. 둘째, 수강생의 학습 선택권 확대를 위해 ‘공유대학’의 개념을 도입할 예정입니다. 우선 2학기부터 인하대와 연세대, 성신여대, 홍익대 등 학점교류 협약을 맺은 대학이 개설하는 과목을 온라인이나 오프라인으로 수강할 경우, 이수증을 교무처에 제출하면 이를 학점으로 인정하는 학점교류를 확대하겠습니다. 우리 대학이 취약한 인문과 교양 교과목 수강이 많이 보완될 것입니다. 셋째, 온라인 공개강좌(K-MOOC)의 수강 학점을 졸업학점에 반영하겠습니다. 국내 대학뿐 아니라 해외대학들이 제공하는 MOOC 강좌의 수강도 가능해질 것입니다. 지난 6월 말 발표한 교육부의 고등교육법 시행령 개정안에 담긴 온라인 교육은 공유대학과 함께 대학 패러다임 전환의 핵심입니다. 넷째, 이번 개편이 교육의 소비자인 재학생 여러분에겐 학습 선택권을 확대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특히 학점교류 대상학교가 다양해 짐에 따라, 학생들이 보다 편하게 신청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개선하고 홈페이지에 게재할 계획입니다.
미래학자들의 예견이 꼭 들어맞으란 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디지털 대전환기의 경쟁적 환경에선 변하지 않는 게 곧 퇴보임은 분명합니다. 코닥, 야후, 노키아, 모토로라처럼 탁월한 경쟁력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글로벌 최강들이 소비자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 건 환경의 변화 때문이었습니다. 대학에도 소비자의 선택을 받기 위한 생존경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총장메세지>
-[총장의 메시지_20] 부자가 되는 법, 그건 따로 공부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