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짙어질 즈음 마침내 모습을 드러내는 발전소. 정문을 들어서자 1년 만의 그룹 회장 방문에 잔뜩 긴장한 얼굴로 직원들이 우리 일행을 맞이했습니다. 인도네시아의 수도 자카르타에서 비행기로 세 시간 그리고 다시 두 시간 넘게 차로 달려 도착한 술라웨시섬의 동북쪽 마나도(Manado) 해안가에 위치한 이 화력발전소는 PT. MDT(pt. MEGAPAYA TANGGUH). 우리 대학 80학번인 이승세 동문이 설립해 2018년부터 상업 발전을 시작한 이 발전소는 역시 특별했습니다. 설비가동률 94.8%로 다른 발전소의 평균 51%에 비해 월등히 높고 인도네시아 전력청의 전력 품질 평가에서 7년 연속 1위를 차지하며 연간 3,500만 달러(USD) 규모의 전력을 공급하는 알짜기업입니다. 이곳엔 인도인 핵심 기술자들을 포함해 모두 143명의 엔지니어가 있고 한국의 남동발전에서 파견 나온 두 명의 엔지니어가 경쟁력을 더하고 있습니다. 본인이 직접 설계해 세운 발전소의 현장 곳곳을 둘러보는 이 회장의 눈길은 예리했습니다. 몇 건의 지적도 나온 듯했습니다.
전력산업이 민영화된 인도네시아에서 이 회장은 PT. MDT 외에도 발전소 두 개를 더 갖고 있습니다. 자카르타에 모기업인 스페이스 테크놀러지(PT. SPACE TECHNOLOGY)을 두고 있는 그는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성공한 한국인 기업가 중 한 사람입니다. 대학에서 항공경영학을 전공한 그가 어떻게 지금의 위치에 올라섰을까. 모교에 기부금 10억 원을 쾌척했을 때 나는 고마움만큼이나 궁금증도 컸습니다. 5월 초 연휴 기간을 이용해 현지에서 그와 함께 보낸 며칠 동안 한 기업가에 대한 개인적 의문이 풀렸습니다. 그는 현대그룹의 창업주 정주영, 동원그룹의 김재철 회장을 많이 닮아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의 가난과 궁핍이 열망을 낳았고 끝내 그를 오늘의 성공으로 이끌었습니다. 과정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충북 진천에서 가난한 집안 막내로 태어난 그는 대학 졸업 후 형님에게 빌린 돈 1만 달러를 들고 인도네시아로 들어갔습니다. 1989년부터 기계 부품 무역업으로 재미를 본 그는 번 돈으로 귀국해 제조업을 시작하면서 소련 붕괴 직후 러시아 진출의 꿈까지 키웠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생각과 달랐습니다. 김포에 마련했던 사업장까지 참담한 실패로 끝났습니다. 37세에 다시 인도네시아로 들어갔을 때 그는 훨씬 강해져 있었습니다. 학교 때 배운 기초지식을 응용해 자동화 전기제어 기계의 설계와 제작을 시작했고, 젊은 시절의 좌절과 시행착오는 새로운 사업 때마다 학습효과로 발휘되었습니다. 정부 발주 사업의 제안서 작업을 하면서 대학교 때 잠깐 배웠던 물리학까지도 더 깊이 있게 독학했고, 낙찰 후엔 투자금 1천억 원을 신용으로 해결해야 했습니다. “그때 준비기간 3년은 인생에서 절체절명의 시기였습니다.” 설비 투자가 핵심인 장치산업의 준비 과정에선 시행착오는 당연한 수순. 공사 발주와 부품 계약으로 사기도 당했고 소송도 경험했지만, 현지에서 꾸준히 쌓아온 신용이 그를 어려움에서 구했습니다. “성실과 신성함, 규율성과 투명성, 지속성과 전문성”은 그의 그룹이 추구하는 가치이고, “신뢰받는 에너지 기업”은 PT. MDT의 슬로건입니다. 방문했던 마나도 발전소 한편에는 묘목들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새로 법인 설립을 마친 사업장에 올 연말부터 옮게 심어지면 300백만 헥타르(약 1천만 평) 세계 최대의 두리안 농장이 탄생합니다. 일요일에도 사무실에 나오는 그가 요즘 집중하는 건 발전용 기계를 직접 설계하는 일이지만, 한편으로 조림지 건설과 광산 개발의 구상도 꽤 구체적이었습니다.
나는 지금 이 글을 귀국 항공편에서 쓰고 있습니다. 이번 여정에선 떠나 오기 전날 자카르타 시내에서 최근 창립한 ‘한국항공대 인도네시아동문회’의 초대에도 참석했습니다. 동남아 김치 수출의 길을 열었던 무궁화그룹의 김우재 동문(통신 61학번)을 포함해 현재까지 명부로 확인된 동문은 모두 7명. 그들은 모두 넓은 세상에서 역동적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번 현지에서 여정을 함께 했던 이승렬 동문(항공경영 ‘86학번)의 세무법인 Jakarta Tax Consulting도 자카르타에서 15명의 직원을 두고 한국기업을 대상으로 하는 세무회계 컨설팅의 허브로 자리 잡고, 지금 인도네시아 최초의 국제회계기준(IFRS) 프로그램 개발에 도전 중입니다. 3년 전 ICAO 총회 참석하고 돌아오기 전날 몬트리올에서 만찬을 함께 했던 우리 동문들 생각도 납니다. 그들에겐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 스스로 혼자 갈 길을 찾아갔습니다. 모교가 그들에게 해 준 건 세상을 살아갈 자신감의 토양이 되었을 뿐입니다. 모교에 대한 그들의 여전한 자긍심이 그저 고마울 뿐입니다.
재학생 여러분,
우리는 누구나 경험과 성취의 힘으로 저마다의 삶을 만들어 나갑니다. 이 세상에는 성공한 기업가들의 이야기가 많지만, 이승세 회장의 성공스토리는 외국을 무대로 했다는 점이 특별합니다. 우리 청년들이 겪는 미래에 대한 불안은 당연한 경험이라곤 하지만, 졸업이 다가올수록 각자의 삶은 종종 불확실성으로 다가옵니다. 같은 강의실을 나서지만, 세상 살아갈 길이 모두 같지도 않습니다. 대기업이나 유망한 중소 중견기업의 취업을 원하는 사람도 있고, 공무원, 참신한 아이디어로 승부를 거는 창업, 대학원 진학과 전문가 자격증 취득을 목표로 하는 등 다양한 선택지가 여러분 앞에 놓여 있습니다. 아쉽게도 이미 저성장 국면이 깊이 들어선 대한민국의 경제를 낙관하기는 어렵습니다. 바깥으로 눈 돌리는 것도 대안입니다. 성장 잠재력이 큰 개도국일수록 뛸만한 무대는 넓고 기회는 많습니다. 인생의 기로(岐路)에서 비즈니스의 세계를 꿈꾸는 사람들은 창업가 정신으로 세상의 변화를 읽어야 합니다. 거기서 기회를 잡아 낡은 틀을 깨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려는 생각과 의지가 중요합니다. 그게 기업가정신입니다. 세상의 성공은 단순히 의지가 있고 없고의 차이가 아닌, 똑똑하고 그렇지 못함의 차이가 아닌 그 방향으로 걸어갈 수밖에 없는 삶의 뚜렷한 방향성과 성실함이 결정합니다. 우리는 성공한 기업가를 통해 그 한 사람의 삶이 역사의 높고 굳건한 주춧돌이 됨을 알고 있습니다. 실패와 역경이 인간을 강하게 합니다. 포기하지 않으면, 반드시 누군가 돕습니다. 신이 돕고, 운명이 돕고, 기회가 돕습니다. 공짜로 얻어지는 건 없습니다. 인도네시아는 아직 경제는 개도국이지만, 인구 세계 4위의 잠재력 풍부한 대국입니다. 선배들이 닦아놓은 저 넓은 세상에 동참할 우리 후학들이 이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총장의 메시지>
-[총장의 메시지_54] 작심삼일(作心三日)의 함정